무용한 침묵의 시간 / 김지현
- 추천 책 : 크리스티앙 보뱅, <작은 파티 드레스>, 1984Books, 2022
(발췌는 쪽번호로만 표기)
 
“몇 시간이고 책을 읽다 보면 영혼에 살며시 물이 든다.
당신 안에 존재하는 비가시적인 것에 작은 변화가 닥친다.
당신의 목소리와 눈빛이, 걸음걸이와 행동거지가 달라진다.” (p.77)
 
유년이 끝나가는 길목, 현실을 들여다보는 시선이 차츰 생겨나고 내면이 격렬하게 요동치던 시기에 나를 구원한 건 독서였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작은 방에 가득 차던 침대 위에 엎드려 동화책을 넘기는 나의 형상이다(엎드려 책을 읽는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고 있는 기억이므로 어쩌면-확실히-조작된 기억일 것이다). 그 어린 몸으로부터 점점 커가는 동안 내게는 늘 책이 있었다. 온 식구가 방 한가득 이불을 펴고 함께 자던 시절이었고, 책을 만난 나는 늘 잠들 수 없었다. 나의 밤은 영원처럼 길었고 이야기 세계에서 더욱 선명하게 깨어있던 나는 현실의 밤이 고통스러웠다. 모두 잠든 방에서 불을 켤 수도 없고 잠들 수도 없던 나는 창문 쪽으로 기어 올라가, 창밖에 밝혀진 희미한 가로등 불에 의지하여 책을 읽었다. 내 삶의 방향은 그때 이미 결정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나를 사로잡은 최초의 이야기는 한 인디언 소녀의 이야기다. ‘검은 머리칼’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의 소녀에게는 남동생과 가족이 있었는데, 어느 날 큰 배를 타고 섬에 나타난 사람들이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몰살한다. 남동생과 소녀는 유일하게 살아남았지만 사람들이 사라진 섬은 야생 개와 동물들이 점거한다. 밤마다 야생 동물들의 위협으로부터 위태롭게 지내다가 결국 남동생이 개들의 습격을 피하지 못하고 죽게 된다. 섬에 홀로 남은 소녀는 자신의 세계를 파괴한 인간들을 찾아 직접 배를 만들어 바다로 나간다.

소설의 제목과 세부 내용은 잊었지만 이 이야기는 나의 깊은 곳에 스며들어 알 수 없는 부분을 변화시켰다. 나의 의지와는 무관한 두려운 어떤 것(운명)으로부터 모든 것을 잃어도 맨몸으로 맞서 망망대해로 나아가는 어린 소녀가 내 속에 들어앉았다. 그 사실, 그 이야기가 나의 세계를 만들어냈다는 진실을 지금 이 글을 쓰며 깨닫는다. ‘영혼에 살며시 물을 들이는’ 독서, ‘내 속에 존재하는 비가시적인 것을 변화시키는’ 독서에 대한 보뱅의 저 문장으로부터 나를 변화시킨 최초의 이야기를 발견한다. 그의 문장을 읽으며 나는 다시 미묘하게 물들고 있다.
좋은 글을 만나면 가슴 깊은 곳에 바람이 분다. 검은 잉크로 찍힌 활자를 모두 녹여내 몸에 스며들게 하고 싶다. 그가 보는 세계-세계의 이면- 그의 시선이 길어 올리는 삶의 진실이 내 세계를 뒤흔든다. 그런 글을 만나면 세상의 숨겨진 비밀을 본 것만 같다. 그래서 해석하고 싶지 않다. 나의 서툰 언어로 어설픈 각주와 풀이를 달고 싶지 않다. 있는 그대로, 세상의 비밀을 품은 그대로 옮겨다 실어나르는 것밖에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런 ‘읽기’는 오롯이 ‘나’를 만나는 시간이다.

“사실 자기 자신에 대해서가 아니라면 삶에서 아무것도 배울 게 없고 알아야 할 것도 없다.
물론 혼자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자신의 가장 내밀한 부분에 이르려면 누군가를 거쳐야 한다.
어떤 사랑을, 어떤 말(言)이나 얼굴을 거쳐야 한다.” (p.60)
 
타자의 언어를 통해, 그의 세계를 통해 나는 나에게 이른다. 나를 만난다. 나를 뒤흔드는, 나의 언어를 초라하게 만드는 글이란 결국 나를 마주하게 하는 글이다. 그런 글이 아니라면 나의 완고한 세계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 글이란 결국 쓰는 이가 오롯이 자신을 마주하며 써낸 글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배우기 위해 읽고 쓴다.

세상의 시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만나는 시간이란 무용하다. 그런 읽기와 쓰기, 침묵과 멈춤은 아무 쓸모가 없다. 사회적 효용성이 있는 정보와 전문성으로 이어지지 않는 읽기와 돈이 되지 않는 쓰기에 골몰하는 인간은 사회에서 무용하다. 그러나 유용한 인간은, “자신의 유용성을 확신하는 유용한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서는 “미약하기 그지없는 정체성”을 지닌다. 그런 인간은 부단히, 겨우 “만사를 원상태로 보존하는 데서, 사회생활이라는 끝없이 반복되는 거짓과 하나 되는 데서 자신의 온전함을 찾는다.”(p.74) 무용한 인간만이, 무용함에 골몰하는 인간만이 자기 자신으로 단단하게 선다. 실은 삶에서 그것밖에 중요한 것은 없다.
 
“독서가 무슨 쓸모가 있을까. 전혀 혹은 거의 쓸모가 없다.
사랑이 그렇고 놀이가 그런 것처럼.
그건 기도와도 같다.
책은 검은 잉크로 만들어진 묵주여서, 한 단어 한 단어가 손가락 사이에서 알알이 구른다.
그렇다면 기도란 무엇일까. 기도는 침묵이다.
자신에게서 물러나 침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그렇다. 기도의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
독서의 가장 명료한 이미지가 그것이다.” (p.77)
 
독서를 만나 유년기가 끝나고 삶이 시작되었다.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삶을 견디기 위해, 혹은 삶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는 독서를 한다. 자신을 만나기 위해 글을 쓴다. 그 순간만은 ‘삶을 죽인’다(p.84). 온전한 내가 된다. 침묵 속에서, 영원 속에서.
휘몰아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때때로 삶을 죽이고 침묵을 사수한다. 온전히 나를 만나는 시간. 고요히 손짓하는 한 권의 책을 뽑아 들고 의자에 몸을 기댄다. 첫 장을 넘긴다. 내 세계를 뒤흔들 검은 문장이 나를 마주한다.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크리스티앙 보뱅, 『환희의 인간』, 이주현 옮김, 1984Books,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