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는 글쓰기 / 김지현
- 추천 책 : 오수영, <아무 날의 비행일지>, 고어라운드, 2021
(발췌는 쪽번호로만 표기)
 
   2018년 겨울, 홍대의 한 골목을 헤매고 있었다. 독립출판으로 첫 책을 내며 입문한 지 6개월 남짓이었고 삶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을 때였다. 오랜 시간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 하나뿐이었고 다른 건 하고 싶은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없었다. 우연한 계기로 시작한 독립출판은 단숨에 유명한 작가로 만들어주거나 떼돈을 벌게 해 준 건 아니었지만 내 삶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끌고 있었다. 독립출판으로 책을 쓰기 이전과 이후로 내 삶은 바뀌었다. 뭐랄까, 그 어떤 외부의 시련이 닥쳐와도 내 손으로 다시 무너진 벽을 세워 올릴 수 있는 도구를 갖게 된 것 같달까. 세상에 맞서는 나만의 강력한 무기를 얻게 된 것 같달까. 글쓰기는 나의 삶 그 자체였고 독립출판은 나를 내 세계 안에만 고립시키지 않고 세상과 연결시켜 주는 다리였다. 덕분에 나는 열렬했다. 그야말로 독립출판에 진심이었다. 당시 부산에서는 독립출판이 아직 생소하던 때였고 서울에서는 독립서점과 독립출판제작자들이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었다. 홍대의 한 전시장에서 열린 ‘찢고 나온 문장들’은 독립출판제작자들이 함께 기획하여 만든 전시였다. 안내를 받아 좁은 통로를 통과해 전시장으로 들어섰다.
  전시장은 생각보다 넓고 강렬했다. 입구에서부터 책에서 찢어 낸 페이지들이 낱장으로 벽면에 가득 붙어있었다. 책의 표지 안에 숨겨져 있던 페이지들이 그야말로 책을 찢고 나와 사람들에게 직접 말을 걸고 있었다. 대형 출판사에서 각 분야 전문가들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책들에 비해 창작자가 직접 쓰고 스스로 디자인하여 비교적 만듦새가 덜 전문적인 독립출판물을 겉모양이 아닌 글 자체로 만나보는 기획이었다. 책의 표지 말고, 이미 유명한 저자 말고, 곧장 문장으로 글을 만나기. 어쩌면 그 어떤 방식보다도 책을 제대로 만나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찢어 놓은 페이지들의 글을 천천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이어지지 않는 글의 조각들이 퍼즐처럼 빼곡했다. 반짝이는 문장들이 속속 눈에 들어왔다. 페이지의 뒷면에는 숫자가 적혀 있는데, 그 페이지들을 찢어낸 책이 진열되어있는 선반 번호였다. 마음에 드는 페이지를 고른 다음 뒷면의 숫자를 찾아가면 그 책을 살 수 있었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어나갔다. 그중 가장 마음을 움직이는 페이지 딱 세 장을 골랐다. 세 장은 모두 하나의 번호를 갖고 있었다.
길쭉한 판형의 회색 표지에 혼잣말처럼 새겨진 제목은 『우리는 서로를 모르고』였다. 오수영 작가를 그렇게 처음 만났다.
  그 날 오수영 작가의 책은 진열된 샘플 단 한 권 남아 있었다. 전시 관리자는 오수영 작가와 짧은 통화를 마치고 작가님이 책을 갖고 전시장으로 오고 있으니 조금 기다려 달라고 했다. 겨우 세 페이지의 글을 읽었을 뿐인데-심지어 연속적이지도 않은-그의 문장들은 내게 파동을 일으켰다. 그의 문장들은 오랫동안 관계를 앓으며 글쓰기라는 나만의 방식으로 사람과 세상을 들여다봐 왔던 나의 긴 시간을 수면 위로 띄워 올렸다. 그의 문장들은 묵묵하고 치열했다. 그는 조용히 그러나 그 누구보다 예민하고 열렬한 시선으로 관계와 삶을 읽어내는 사람이었다. 찬 겨울바람을 헤치고 가쁜 호흡으로 전시장에 도착한 오수영 작가는 떨리는 손으로 “제가 악필이라…” 하며 정성껏 싸인을 해주셨다.
그렇게 나는 그의 독자가 되었다.
 
 “그렇게 글쓰기는 나의 유일한 탈출구가 되었다. 일상의 균형이 흔들릴 때마다 글을 썼다. 사람에 지쳐 자아가 소멸되는 기분이 들 때도, 몸이 녹초가 되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을 때도,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것으로 하루를 끝내기보다는 아무 문장이라도 기록하며 스트레스를 함몰시킨 뒤 잠들었다. 그런 밤을 보낸 뒤의 아침은 마음을 통째로 세탁한 것처럼 말끔하고 개운했다.” (p.66)
 
  예기치 않은 팬데믹으로 세상은 각각 문을 닫아걸고 잔뜩 웅크린 채 시간이 흘렀다. 많은 사람들의 삶 역시 쪼그라들거나 감당하기 벅찬 공백이 생겼다. 특히 세계와 사람을 연결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생활은 크게 변화했다.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열렬하게 세계를 가로지르며 살아왔는지 실감한 시간들이었다. 승무원으로 일하던 오수영 작가는 그 빈 여백 같은 시간을 글쓰기로 견뎌냈다. 글쓰기가 삶의 유일한 탈출구인 그는 글쓰기로 사람과 세상을 관찰했다. ‘서툴던 과거의 마음을 조금씩 정돈하’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늘 미미하게 흔들리는 생활을 견디기 위해, 그럼에도 ‘오직 사람 사이에서, 사람만이 가능한’(p.202) 연결을 위해 글을 썼다. 업무차 가게 된 낯선 도시의 숙소에서, 흔들리는 기내 벙커 안에서, 자신의 방 안에서 그는 이방인으로 걸으며 만난 세계를, 비행 중에 만난 사람들을 지키고 지켜보며 자신의 언어로 썼다. 화려하고 이색적인 여행지의 풍경보다 골목의 노숙자들을, 특별한 사연의 사람보다 희미해졌지만 삶에 자국을 남긴 흘러간 사람들을 쓴다. 그의 펜 끝을 따라 가면 야간 비행 중 어두컴컴한 기내에서 조명을 밝히고 시를 쓰는 할머니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을 조용히 지켜보며 응원하는 누군가도.
 
“삶을 살아가면서 기댈 수 있는 곳 하나라도 갖고 있다면 대단한 행운이 아닐까. (…) 하지만 설령 주위에 아무것도 없다 할지라도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비행기가 흔들릴 때 몸을 최대한 낮추는 방법으로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은 스스로가 자신의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으니까.” (p.29)
 
  그의 글을 읽으면 어쩐지 계속해서 세상을 걸어나갈 힘이 생긴다. 현재를 단단히 꾸리는 일에 힘겹고, 숱한 관계들에 흔들리고, 세상이 너무 예민하게 감지되어 때때로 아프더라도 외면하지 않고 자신과 세상을 충분히 들여다보며 스스로에게 버팀목이 되는 글은 함께 견뎌주는 힘이 된다. 삶의 정답을 주는 것보다 함께 흔들리는 존재가 더 큰 의지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그는 계속해서 스스로의 버팀목이 되기 위해 글을 쓰고 책을 만든다. 그의 글을 읽으며 우리는 각자 스스로의 버팀목이 되어 타인과 연결되고 한걸음씩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